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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희목사님 설교집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

윤봉원 2013.08.30 17:56 조회 수 : 837

83-05-15 주후요 15:1-14날자: 1983년 5월 15일, 주일오후
제목: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
본문: 요한복음 15장 1절∼14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우리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 올바른 성경 깨달음의 중요성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은 참 획 하나도 가감을 못 하는 정확무오한 말씀인 것을 믿어야 하고 또 성경을 본문만 읽어 가지고는 잘 모르니까 부득이 어린 교인들이 해석을 들어서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또 장성한 교인들도 자기 혼자라도 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을 하면서 새김질을 할 때에 거게서 마치 고기를 씹으면 맛이 나는 것처럼 거기서 깨달음이 나오고 또 그 영양에 심령이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을 읽어야 또 성경에 기록된 그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해석을 할 때에 해석을 한 진리를 농사짓는 이치 가지고 해석할 수도 있고, 고기 잡는 이치 가지고 해석할 수도 있고, 또 이런 모든 정치하는 그런 이치를 가지고도 해석하는 데에 이런 것 저런 것을 사용해서 그 뜻을 표시하는 것은 몇 가지든지 여러 가지로 할 수가 있겠다. 또 온갖 비유도 예화도 다 거게 인용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한 진리를 두 가지로, 두 이치로는 해석을 하면 어느 게 틀렸든지 틀린 것이고, 또 한 이치로 해석을 한다 할지라도 그 해석이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설교를 들을 때에 이 설교는 성경을 소개하는 것이다. 해석하는 것이다. 또 성경을 체계 있게 이렇게 모두 다 조직을 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를 들을 때는 '이 설교가 성경대로냐 또 이 해석이 성경 해석을 바로 한 것이냐?' 여게다가 중점을 두고 설교 말씀을 들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안하고 자기 기분에 맞나 안 맞나, 또 들으니까 마음이 시원하게, 자기 마음에 정서의 마음도 있고, 불량한 마음은 불량한 설교가 나올 때에 기분이 좋을 것이고, 또 정서의 마음이 있을 때에는 정서의 설교가 나올 때에 좋을 것이고, 한참 비관에 들어 있을 때에는 비관의 설교가 나올 때에 자기 비위에 맞을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주관을 근거해 가지고 모든 설교를 듣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다 잘못된 것이요 마귀의 대미혹에 든 것이다.
그런고로 설교를 들을 때나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에 명문되어 있어서 그 성경 본문만 해도 진리를 환하게 깨닫는 그런 데도 있고, 또 상징으로, 또 비유로, 또 예화로, 또 모형적으로, 예표적으로, 이렇게 성경에 그 믿는 도리를 표현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한 가지가 아니니까 성경을 가르치는 그 설교를 들을 때에 그 이치에 맞나 안 맞나 해 가지고, 만일 이치에 틀리면 어떤 웅변을 가지고, 어떤 열변을 가지고, 또 어떤 유식한 말을 할지라도 그것은 전부 배암의 말이니까 들을 것이 없고 '여기 있다가는 사람이 죽겠다. 여기는 사람 죽이는 역사를 지금 하고 있다.' 이렇게 깨달아져야 할 것인데 이것이나 저것이나 뭐 구별성이 없으니까, 테레비를 보다가도 거게서 놀라지 안하고 자꾸 거기 취미가 붙어 가지고서 자꾸 보고보고 자꾸 보는 것은 자기가 듣고 배우려고 하는 그 지식이 표준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성경을 표준 해 가지고 하면 그런 것은 볼래야 세상 소식이나 듣기 위해서 가끔 볼 일 있지 아무런 거게서 자기가 인생 구원을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2.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1. 창조적으로
오전에도 말씀을 했는데 '아버지는 농부라' 또 '나는 포도나무라' 그러면 예수님은 신인양성일위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 우리를 구원 하신 대속의 공로를 베푸셔서 그 공로로 우리를 다 사서 죄에서 건져 구원하신 이 중보자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이렇게 비유한 것은 이것은 확실한지, 그 해석은 맞는지 안 맞는지 그걸 뭘 알아야 돼지지 이래 말해도 좋다 저래 말해도 좋다. 그저 찬송도 지어 놓은 것 보면 그렇다.
어떤 찬송은 가사에다가 중점을 두고, 어떤 찬송은 곡에다가 중점을 두고, 어떤 찬송은 곡보다도 음 거게다가 중점을 둬 가지고 아무런 곡도 별로이 고상하지 안하고 하나 그 찬송하면 음이 좀 좋은 음이 나오니까 음 표준으로 이래 여러 가지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이 설교 듣는 것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큰 고함 소리라야 이제 그 사람은, 뭣이든지 뭐 어쩌든지 고함이나 지르고 강대상이나 뚜드리고 이렇게 고함지르면 '어따 오늘 은혜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또 무슨 열변을 토해서 세상 어떤 그 학을 강론하는 것처럼 많은 문자나 쓰고 모든 학을 이 학 저 학, 뭐 천문학, 지리학, 과학, 의학, 무슨 뭐 오만 것들을 다 주 인용해 가지고 이래 하면 '아따 오늘은 참 설교 잘 하더라' 또 이렇게 하는 사람, 정서를 거석해 가지고, 공연히 성경 진리는 하나도 아닌데 무슨 슬픈 소리를, 그 사람의 마음에 거석할 수 있도록 이북에 지금, 처음에 월남한 직후에는 이북에 있는 가족들 생각하면 다 눈물이 나오니까 가족들의 그 비참한 것을 말을 하면서 이러면 모두 뭐 눈물이 나오고 '와아' 하면 또 그게 은혜라고 또 한다. 이런 것 다 헛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신구약 성경 이 도리가 예수 믿는 유일한 법칙이다. 이 외에는 법칙이 없다.
그러면 성경 도리를 해석할 때에 '이 해석이 과연 맞으나 안 맞으나? 궤변으로 짜다라 백지 주 끌어 대 붙인 것이냐? 이 해석은 했지만 이것은 세상적으로 한 것이냐? 인간을 중심으로 한 것이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것이냐? 금생을 중심해서 한 이 땅의 복음을 말하고 있느냐 이제 하늘의 복음을 말하고 있느냐? 어디로 치우쳤느냐? 이게 과연 치우치지 안하고 모든 것이 다 체계적으로 바로 되어 있느냐?' 이제 말을 들을 줄을 알아야 자기가 쓴 물을 먹지 안할 것이고 또 그 진리를 깨달아서 딱 거머쥐어야,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앞으로 가다가는 재물도 다 내놔야 되는 때도 있고, 자기의 사업을 다 내놔야 되는 때도 있고, 자기 직장을 다 내놔야 되는 때도 있고, 또 자기의 위신과 권위 뭐 자존심 그런 것을 다 내놔야 되는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매장이 돼야 되는 때도 있고, 감옥에 갇혀야 되는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매를 맞아야 되는 때도 있고, 죽어야 하는 때도 있다 그거요. 그럴 때에 공연히 사람이 자기를 그런 희생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하다 하는 이것을 확실히 믿고 그다음에는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는 아파도 견뎌야 되겠고, 감옥에 들어가도 어짤 수 없고 죽어도 어짤 수 없다.' 이렇게 그 깨달음이 성경대로 된 확고부동한 그만한 자기 속에 확실성이 있어야 자기를 희생하는 실행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 거기 대해서 확신이 없으면 무슨 회생을 하겠습니까? 자기감정이나 취미나 뭐 춤쟁이들이 춤추는 것 노래쟁이들이 노래 부르는 그런 것 같은 감정 그런 것 가지고서 목숨 내놓을 사람이 누가 있으며 자기의 모두 사업을 내놓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바로 깨달으려고 애를 쓰면 될 터인데 그저 그만 단언으로 가지고서 한 마디 두 마디 이래 그뭐 무슨 묘한 단어나 쓰면 그런 거나 깨달아 들을까 이렇게 많은 말을 해 가지고서 하나의 이치를 딱 가르친다고 하면 그만 그 이치에 대해서는 그만 하다가 재미없다고 그만 말아버립니다. 그만 지루하다고. 제가 들어 가지고서 진리를 깨달으면 아직까지 지금 그걸 시작도 안 했는데 그 깨닫게 되면 다 끝마치기까지는 알고 싶어서 갈급해야 그게 바로 말귀를 알아듣는 것인데 그렇지 안하니까 자꾸 시간이 지루해진다 그거요.
그러면 여기 비유로 말하면 농부는 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이며, 또 '나는 포도나무라' 했으니까 '나는' 하는 건 누구를 말한 건가? 또 과실은 무엇을 말한 건가? 과실을 맺도록 하기 위해서 깨끗이 한다고 했으니까 깨끗이 한 거는 뭘 가리켜 말한 것인가? 이걸 우리가 확고부동하게 꼭 잡아야 되지 이렇게 해석해도 되고 저렇게 해석해도 된다고 하면 이렇게 해석해서 감옥에 들어가야 될 때에는 저렇게 해석하면 또 감옥에 안 들어갑니다. 이러니까 이리 저리 다 피해버리고 하면 자기의 신앙 걸음을 걸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니까 그 이치를 깨닫는 그게 없으면 안 된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 그 말은 성경 말씀을 깨달아서 네 미래사나 현재사나 네 과거나, 과거 반성에 대해서도 눈이 밝고 또 네가 과거 현재를 알았으니까 네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보응에 대해서도 밝히 볼 수 있고, 네 현재가 지금 어떻게 어데 속했으며, 무슨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힘을 가지고, 어떤 목적을 가졌는가 그런 걸 다 바로 보면 알 수 있을 터인데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니까 눈이 어두워서 바로 보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 뭐 진리는 한없이 지금 범위가 넓은데 거게서 찍해야 한 뭐 백분지 일이라도 할 수 없는 한 모때기만 들고 말하는 그것도 못 알아들으니까, 그걸 똑똑히 알아 가지고 그놈을 놓지 않으려고, 그걸 놓지 않으려고 뽈끈 붙잡고 이래 가다 보면 나중에 가 복잡한 것이라도 차차 차차 참 실마리가 풀린다는 말과 같이 하나씩 둘씩 풀려서 이래 해석이 될 것인데 하나도 잡은 것이 없으니까 나중에 가서 보면 현실 닥치면 현실에 다 속화돼 버리고 그만 그대로 지나버리고 말고 이 현실을 이용하지도 못하고 극복하지도 못하는 것이 깨닫지 못한 연고인 것이다.
또 우리가 공연히 바빠서 이 일도 바쁘고 저 일도 바쁘고, 이 일도 중요하고 저 일도 중요하고, 이 일도 재미있고 저 일도 재미있고 하지만 재미있을 일 한 내끼도 없고 중요한 일 하나도 없다. 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구원 이루는 믿음 지키는 그 외에는 할 일이 없다고 단언을 지워도 틀림없다. 뒤에 가서 '네가 단언지운 것 이래 지나친 말해서 사과해야 안 되겠나?' 사과 안 해도 된다.
아버지는 농부라 하는 이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켜 말하심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러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에 주가 되시고,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서 생산시킨, 창조시켜서 출생시킨, 모든 것에 다 우리의 그 전부의, 구원이나 구원 전이나 다 그분에게서 나왔다는 뜻으로 아버지라 하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된 것은 우리의 구원이 다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그것인데, 여게 아버지라 하면 특별히 우리를 창조하신 그 면과, 창조적으로 우리를 탄생하신 분이다. 우리를 조성해 가지고서 탄생하신 분이다. 또 독생자를 보내 가지고 우리를 구속적으로 다 속량해서 속량해 낸 분이다. 또 우리를 중생시키신 분이라. 이래서 이 하나님을 가리켜서 아버지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여게 아버지라 하면, 예수님이 창조주시요 모든 주시지만 예수님이라 하면 특별히 우리의 대형 대행 대화친의 제물되신 신인양성 일위 되신 이를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할 때는 예수님의 신성이 하나님이요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가, 여게 아버지로 나타난 이거는 아버지가 비도 오게 하고, 춘하추동 사시도 조절하시고, 또 이 모든 사람의 나고 죽고 늙는 것도 다 혼자 조정하시고, 이렇게 사회와 국가와 민족과 인류와 만물과 이 모든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존재 이런 것을 홀로 지금 총 관리 운영을 하고 계시는 이 하나님을 가리켜서 할 때에 여게 아버지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 하나님 아버지.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면 우리로서는 바로 부르는 일이 되겠다.
2.2. 포도나무에 전부를 다 기울이신다.
아버지는 농부라 했는데, 포도원 농부라 이랬는데 이 포도원에는 이 비유기 때문에, 포도원에 누가 포도나무 하나 보고서 포도원 차려놓고 있는 사람이 어데 있겠소? 여게는 포도나무 하나뿐입니다 포도나무가 둘이 아니오.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포도나무라, '나는 포도나무라' 예수님을 포도나무라, 또 '너희는 가지라' 그러면 예수님의 구속을 입을 자들, 입은 자들, 이는 다 포도나무 가지라 이렇게 말씀했다.
그러면 아버지가 하는 일이 이 포도나무 가꾸는 일인데 에베소서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라' 이랬다. 기업이라 말은 쉽게 말하면 '이 사람들은 뭣 먹고 사노?' '이 사람들은 어느 직장 하나 그 직장 그것이 그 사람들의, 기업이다. 그 직장 가지고서 연명하고 산다. 그 직장이 없어지면 굶어죽는다. 그 직장 가지고 의식주하고 그 사람들의 뭐 생사가 그 직장에 달렸다.' '이 사람들은 뭣 먹고 사노?' '이 사람들은 그저 약간되는 토지, 얼마 안 되는 토지 그것이 이 사람들의 기업이다. 그러니까 그 토지가 이 사람들의 명목이 달렸다.' 그거 아니면 굶어죽고 그것 가지고 먹고 지금 명목이 달렸다.' '이 사람들은 지금 기업이 뭐이냐?' '이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어떤 회사에 분업으로 가공업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이 사람들의 목숨이다. 그런데 이 사람아, 그 특약을 똑 잡아뗀다 하면 이 사람들 죽으라 말 아니가? 이 사람들 그게 목숨인데. 바로 이 사람들의 생명인데. 서로 계약해서 거래하고 있는 가정 공업 그걸 그만 딱 떼 버리면 이 사람들 안 굶어죽나?' 그것 모양으로 에베소서에는 그게 기업인데, 에베소서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기업이라 이렇게 했어. 우리를 하나님의 기업이라. 말하자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먹고 산다 그말이오. 우리를 먹고 살고, 우리 뜯어먹고 살아. 우리 먹고 살고 우리에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그 모든 희로애락, 뭐 그것 좀 과격한 말하지만, 사람으로 말하면 생사화복 모든 행불행이 전부 기업에 달린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렸다 그렇게 말씀을 했다.
이러니까 여게는 포도원 농부라고 했으니 이 농부에 대한 해석을 할 때에 이 농부가 이 포도나무에게 자기의 있는 소유를 다 하고, 또 자기의 모든 실력을 다 해서, 전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이 포도나무에 기울인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는 포도나무가 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 하나님의 교회, 이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전소유와 전 능력과 전 노력을 다 기울인다. 하는 이 해석이 틀렸느냐 맞았느냐 이것부터 단정을 지워야 된다. '그 해석은 억지로 꿰맞춰서 한 해석이다. 그 해석은 맞다, 틀렸다, 그거는 틀림이 없다.' 모든 성경을 볼 때에 우리 사람으로도 이 농부가 포도나무 하나 거기다 다 생명 다 달고 했으면 그 포도나무 기르는 데 전심전력 기울일 것이고 자기의 있는 자본 다 투자해서 그 포도나무 잘 되도록 할 것 아닌가?
또 성경에 말하기를 다 그래 놨다 말이오. 이 모든 것을 주를 위해 주는 예수님인데 예수님의 구속을 위해서 모든 것이 지음을 받았다 그랬어. '주를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 계시록에 말씀을 했다 그거요. 또 '주를 위해서 있다' 이랬다. '모든 것이 주에게 나오고 또 주에게 돌아간다'(롬 11:36) 이렇게 말했다.
이러니까 이 하나님의 전소유와 전능력과 전노력을 다 포도나무를 위해서 기울이는데 그러면 포도나무 주인은 포도나무는 한 나무지만 가지는 여러 가지인데 그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은 포도나무에 있는 진액이면 제가 못 빨아 그렇지 빨면 먼저 빠는 놈이 다 빨아서 뭐 포도나무에 진액이 있는 포도나무 진액 다 빨면 빠는 대로는 밑에서 대 줘야 되지 안 대 주면 밑에 것이 말라버려 안 된다. 그러니까 가지는 둥치에 것을 빨고, 둥치는 그 지기에 있는 것을 빨고, 이러니까 농부는 자꾸,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부를 다 기울이고' 그말이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소유와 능력과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고,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는 뭣 하노? 하나님 아버지는 전부 예수님 위했어. 성령님은 뭣 하노? 성령님도 예수님 위했어. 천군 천사들은 다 거기 수종들고. 이런데 그러면 뭣을 보고서 이렇게 농부된 하나님 아버지가 전부를 다 기울이는가? 그것은 열매를 보시고 그렇게 하신다. 과일 보고 하신다.
2.3. 사랑의 계명을 지켜 사죄, 칭의, 화친의 열매 맺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면 과일은 뭘로 해석할 거냐 그말이요? 그 과실을 무엇으로 해석을 할 것이냐? 자 아버지가 소유와 전능력과 모든 노력을 다 포도나무를 위해서 기울이니까 그게 포도나무를 미워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이다. 포도나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요? 그게 포도나무를 사랑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게 포도나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것 아닙니까? 포도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 기울이지 포도나무를 사랑하지 안하면 기울일 수 없고 또 포도나무 거게다 모든 소망을 달고 있으니까 포도나무를 사랑할 수밖에 더 있습니까? 이러니까 기울이는 그것이 포도나무를 사랑하는 것이니 전소유와 전능력과 전노력을 다 포도나무를 위해서 전부 기울이는 그게 포도나무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것을 받아 가지고 소유 전부와 능력 전부를 가지고서 포도나무를 위해서 전적으로 노력하시는 수고하는 그 수고의 은총 속에 있는 것이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 해석이 어찌 되겠소?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이라 말이오. 이것 이게 억설이 돼 버리면, 억설이 되면 구원 뭐 헛일이다. 억설이 돼 버리면 자기가 암만 그래 배워도 앞으로 생명 내놓고 나갈 만한 그런 단계에 가면 다 팽개쳐 버리고 맙니다. 이게 포도나무를 사랑하는 것이요 포도나무가 그 사랑 안에 있는 것이 이 은혜를 받아 이 은혜 속에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이렇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같이 우리도 너희를 사랑하노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했다. 지금도 거하고 영원히 거한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한다' 그말이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전소유와 전능력을 기울여 나 위해서 역사하시는 그 은혜를 내가 받아서 은혜 속에 내가 있는 데에는 그의 계명 지키는 것이 그의 은혜 속에, 그의 사랑 속에, 그의 전소유 전력을 기울여서 나를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 속에 있는 것이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니 사랑 속에 있는 그 방편은 아버지의 계명 지키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이와 같이 우리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것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하는 이것이 아버지가 주님을 사랑할 때에는 하늘의 것과 땅의 것 모든 것을 다 가지신 아버지가 다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셔서 모든 걸 다 투자했다 그말이오. 이제는 주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로 아버지의 명령을 완전히 받아서 율법에 온전함을 이루었어. 온전함을 이루고 난 다음에는 이제는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다 내게 주셨다' 이랬다 말이오. 이랬으니까 처음에는 아버지가 가지셨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가진 것이 아니고 주님이 가지셨다 그말이오. 주님이 가지고, 아버지가 이 모든 것 가지고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제는 '이제는 내가 이 모든 걸 가지고 너를 사랑한다' 이래 놨다 말이오. 저 조는데 이것 못 알아들으면 뭐 막 쭉정이 되는데요. 이것 못 알아들으면 쭉정이 돼. 여게 재미가 붙지 안하고 '아, 됐다. 이만하면 됐다. 천지가 다 내것이다, 뭐.' 부러울 게 하나도 없다. 이래 깨닫지 안하면 헛일이라 말이오.
'내가 너희를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것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아버지가 모든 것 다 가지고, 다 가지고 아낌 없이 당신의 기능과 당신의 소유 전부 다해서 나를 위해서 기울인 것처럼 이제는 내가 아버지와 같이 아버지에게 다 받아서 내가 아버지같이 부자가 됐다. 부자가 돼서 아버지가 부요함같이, 아버지가 능력 있는 것같이 꼭 같은 능력도 그렇고, 소유도 그렇고, 그런 꼭 같은 내 소유와 현실을 가지고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들을 사랑한다. 이러니까 너희들도 내 계명을 지켜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이렇게 말씀했다 말이오.
그러면 사랑 안에 거하면 그 사랑이 뭐인데? '사랑은 이것이니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는 그것이 바로 내 계명 지키는 것이라' 또 그래 말씀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계명 지킴으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고 너거도 계명을 지킴으로 내 사랑 안에 있으라. 계명 지키는 게 뭐입니까? 그러면 창세기 1장에서부터 내리 딱 거기서 한 절 한 절 실행을 해 보라 말입니까? 그게 아니고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그것이 내 계명이니라' 내 계명이 딴것 아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젓같이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는 그것이 내 계명이니라.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기를 어떻게 사랑했는가? 요한일서에 말하기를 '사랑은 여게 있으니 독생자를 보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생명까지 다 바쳐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 하는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말씀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내가 받았다. 아버지가 나로 하여금 모든 것 당신이 시키는 대로 다 순종해서 아버지가 나에게 맡겨 주신 자를 다 구원하라고 하시는 그것이 당신의 계명인데 그 계명 지키려고 하니까 아버지가 내게 다 기울여서 나 도와 주신 우리도 나 가진 것을 전부 다 투자해서 내가 그 계명을 지켰다. 그러면 그 계명을 지킨 그게 뭣이냐? 그게 사랑이다. 그러기에 너 희들도 서로 사랑하는 그것이 내 계명 지키는 것이요 또 내 계명 지키는 것이 내 사랑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라 그러면 계명 지키는 것, 사랑하는 것이 계명 지키는 것이다. 계명 지키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 계명 지키는 것이다. 계명 지키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하는 것이 뭣인데? 구체적으로 똑똑히 말하면 사랑이 뭣인데? 사랑은 내나 있는 것을 다 기울여서 대형 대행 대화친으로서 대속의 구속을 이룬 그것이 사랑이다. 그러면 그 계명을 지키는 그것이 곧 구원을 주는 그것이 그 계명 지키는 것이요 그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여게다가, 사랑은 다른 데다 말하기를 '사랑은 사죄 칭의 화친의 새생명 주는 그것이 사랑이라' 이래 말했는데 '여기는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는 그것이 내 계명이니라' 그렇게 아주 크게 그렇게 강령을 들어서 한 말로 표현을 했다.
그러면 이것은 겉에는 사랑이라 했는데 사랑을 파고 들어가 보니까 이제 그 속에 삼 요소, 사죄 칭의 화친의 새생명 그 세 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는 죄를 타협하지 안할라 하는 것, 범죄하지 안할라 하는 것이니까 범죄하지 아니할라 하는 거기에는 싸움이 일어나고, 원수가 일어나고, 부모와 자녀가 원수가 되고, 뭐 부부간에도 원수가 되고, 형제끼리도 원수가 되고, 인간의 죽임이, 가인과 아벨이 이것 때문에 죽임이 생긴 것인데. 또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의를 행하려고 하고 또 땅위에 있는 모든 자기중심의 것들에게 피동되지 안할라 하니까 이것도 또 싸움이요 원수 맺는 것이라 그거요. 또 하나님을 배반하면 그만 들씬들씬 좋다고 친구가 될 터인데 하나님 배반 안 할라 하니까 또 원수되는 것이다.
이러기 때문에 여게다 표현하기를 내 계명은 이것이니 내가 너희를 사랑함같이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그러면 껍데기는 사랑인데 속은 싸움이요 원수지는 것이다. 껍데기는 사랑이요 속에는 원수되는 것이라 그거요. 그래서 우리는 껍데기 사랑을 가지고, 외부에 사랑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부득이, 참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함으로 사랑을 버리지 않으려고 서로 상대방을 애끼고 이렇게 사랑을 하면서 사랑 속에 부득이 사죄에 대해서 칭의에 대해서 화친에 대한 이 세 가지 하나님의 구속을 벗지 안하고 구속을 자기가 입고 있을라 하고 이 구속을 기념하려고 하니까 이것, 이것 원치 않는 모든 사랑커녕 미움이 막 들난다 그 말이오. 미움이 나타나.
이러니까 잘못하면 이 사랑을 말하지 안하고, 이게 사랑인데. 사랑을 말하지 안하고 '너희들이 사죄와 칭의와 화친만 가져라' 이러면 그만 서로 사랑하는 여게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안하고 화평은 되지 안하고 전부 마구 뭐 이렇게 딱딱해서, 딱딱해서 사람이 견디지를 못할 거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거룩함과 화평함을 가지라 이것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대로, 이 사랑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부득이 해서 사죄로 말미암은 참 그 불화하는 것 분쟁이, 칭의로 말미암아 불화와 분쟁이, 하나님과 화친해서 하나님 배반치 안할라 함으로 말미암아 불화의 이 분쟁이 일어나도 이것이, 상호간에 생각하기를 이는 그가 나를 아주 멸시하고 '뭐 하나님의 계명 지키면 되고 범죄하지 안하면 되지, 의를 행하면 되지, 또 하나님만 모시면 되지 네까짓 거야 가나 오나 네까짓 게 무슨 상관 있노? 그까짓 거.' 이렇게 생각을 가지는 이런 생각을 상대방이 가지지 않도록 자기는 사랑을 가지고, 이 사랑을 가지고 속에 내부가 되면 좋겠는데 내부 때문에 이 사랑 가진 이것이 흠이 나고 이 사랑에 쪼가리 나고 때가 묻고 불화가 이런 것이 나져도 너는 이 사랑을 가지고서 안에 그 세 가지 구속을 입어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된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내 계명은' 그 계명은 뭣 하는 계명입니까? 그 계명은 죄짓지 말라 계명이다. 의를 행하라 계명이다. 화친하라는 계명인데 그 계명인데 그 계명을 말씀하시기를 '곧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이것이라' 표시에 사랑으로 표시를 했다. 계명을 표시하기를 사랑으로 표시를 했다.
그래서 열매를 맺으면 아버지의 전부를 받고, 아버지의 전부를 받은 것은 뉘가 받았느냐?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음으로 아버지의 전부를 다 받았고 이제는 예수님이 그 다 받아서, 아버지는 전부 예수님에게 다 기울이고 예수님은 또 우리에게 우리가 열매를 맺으면 다 기울입니다. 아버지는 주님에게 다 기울이고 주님은 우리에게 다 기울이는 이것을 구별하지 안하고 '아버지가 포도나무를 위해서 다 기울인다' 포도나무 둥치 위해서 기울인 것이니까 가지 위해서 기울이는 것도 되고 잎사귀 위해서 기울인 것도 되지 않습니까? 이걸 분리를 해서 말을 하면 논리적으로 그렇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제 우리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전소유와 참 지극한 능력과 하나님의 그 무한하심의 열심의 뜨거운 노력이 그것이 우리 위해서 있는데, 나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위해서 있는데, 우리 위해서 있다는 말은 종합체인데 주님은 머리시요 우리는 그 몸으로서 주님과 우리와 합해서 교회되는 우리를 위해서 있는데, 그것을 개별적으로 개체적으로 말하면 곧 나 위해 있는 것이다. 우리 가정 위해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 위해 있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인데. 전부를 다 기울이는 이런 지극한 역사, 이 은혜의 역사를 자기가 힘 입으려고 하면, 전능의 능력이 나 도우심을 입으려고 하면, 전소유를 다 기울여서 내게 투자하는, 투자해서 나를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게해 주시는 그런 은총을 받으려고 하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을 해야 되느냐? 열매 맺는 일 해야 된다 여게까지를 딱 단정을 잡아야 된다 말이오. 열매 맺는 일을 해야 된다.
그러면 열매 맺는 일은 뭐인데? 열매 맺는 일은 곧 그 계명 지키는 것이다. 그 계명 지키는 것인데 그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받는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을 다 받는다. 한 가지 말이라 말이오. 사랑을 다 받는다. 그 모든 것을 다 받는다.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걸 다 가지고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내가 받으려고 하면, 전지전능의 무한한 능력 가지고서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다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다 기울여 가지고서 나를 사랑해서 구원하는 그 사랑을 다 받으려고 하면 나는 그 방편이 뭣이냐? 그는 계명 지키는 것이다. 계명 지키면 그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그러면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거하려고 하면 그 계명을 지키면 여러 가지 애로가 있고,
이것 못 알아들으면 헛일이라. 무식해도 알려고 하면 알아들어져요. 농사짓는 이치야 그것 모를 사람이 어데 있소? 국민학교 안 나와도 농사 그거야 시골 사람은 다 아는데 도시 사람은 대학을 졸업해도 그것 잘 모를 거야. 이러기 때문에 도시 사람이 언제든지 시골에서 난 사람의 종 된다. 어데든지 그 정권이나 무슨 권세는 다 시골에서 난 사람들이 잡지 도시에 난 사람이 잡지를 못하요. 그러니까 시골에서 난 사람은, 시골에는 모든 보이는 모든 삼라만상이 다 실물교재요. 실물 교재니까 뭐 읽기도 힘들지 안하고 자꾸 뭐 저절로 보이고 저저로 들리고 이러는 건데 그걸 도시에 살면서 하려면 광문다학으로 많이 읽어야 된다 말이오. 많이 읽어야 되지 뭐 달리는 취할 도리가 없으니까. 졸면 못 알아들으면 헛일이라 말이오. 못 알아듣기 때문에 구원을 이룰 때에 마귀에게 항상 이용만 당해 가지고서 제 주관적 구원이지 공공하게 공정한 구원을 이루지는 못 한다.
그리 되면. 다 다 받으려고 하면 다 받는 그게 뭐이냐? 다 나에게 소유, 능력, 당신의 노력을 다 기울여서 나 위해 기울인 그게 뭐이냐? 아버지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다. 주님이 그 모든 걸 다 기울여 가지고서 나에게 기울인 그것 뭐이냐?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에게 주님이 그 사랑 받으려고 함으로써 하는 것은 계명 지킴으로 그 사랑 받은 것처럼 우리도 주님이 다 기울여서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내가 받으려고 하면 내가 계명 지키는 것밖에 없다.
그러면 계명을 어떤 계명 지켜야 되느냐? 계명은 간단하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는 이것이니라 그러면 사랑하면 뭐 아담 하와의 사랑을 가질까요 부부 사랑 같은 사랑을 가질까요 친구 사랑 같은 사랑을 가질까요? 모두 다 사랑 사랑 이 세상에 많이 말하고 있는데 무슨 사랑을 가지라 말입니까? 사랑은 두 가지가 있다. 배암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니 배암 사랑은 죽인 사랑이요 죽이는 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은 살리는 사랑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데 있습니까? 그게 몇장에 있습니까, 요한일서? 요한일서 몇 장에 있지요? 4장 10절, 한번 읽어봅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말이다. 인간 사랑이 아니라 그말이다. 여게 기록해서. 인간 사랑이 아니라.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래 여게 사랑을 해석해 놨다 말이오. 이러니까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 뭣이냐?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하는 것이 뭣인데? 구원하는 것을 왜 그러면 구원이라 하지. 구원이라 하지 왜 사랑이라 했느냐? 사랑이 구원이요 구원이 사랑인데, 겉은 사랑이요 속에는 참 구원인데 구원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지만 구원만 말하면 사람들이 밤송이 모양으로 까끌까끌해서 접하지를 안하고 이러니까 사랑이라고 말을 했는데 이 사랑을 사람들이 인간 사랑의 껍데기 그런 관념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랑 그것을 말하면 부드러워서 사람들이 좀 접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죄짓지 말아라. 의롭게 살아라. 하나님과 동행해라.' 이렇게 거룩 거룩만 자꾸 주장하면 나중에 가서 사람들이 너무 딱딱해서 원수가 돼 버리니까 이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화평을 먼저 하고 거룩함을 좇으라 요래 하는 말씀같이 여기도 서로 사랑하는 이것이 그 계명, 한 말로 말하면 그 계명 지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그러면 사랑하려고 하면 구체적으로 실상으로 하라 하면,
그 사랑하는 게 무엇이냐?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네가 벗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벗지 않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네가 벗지 않는 그 사랑을 이웃에게 줘 가지고서 이웃도 받아서 가지도록 그와 같이 하는 것이 그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가 이 구원을 벗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로구먼요? 그러면 이 구원을 벗지 않는 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로구먼요. 또 이 구원을 이웃에게 전해 주는 것이 그것이 사랑하는 것이로구먼요.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로구먼요?' '그래. 하나님의 육 십육 권의 계명을 통틀어서 다 전부 똘똘 뭉쳐 가지고 다 종합해 가지고서 이것을 전부 꼬와 가지고서, 이것을 꼬와 가지고서 그 진짜로 하나를 만들어 버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 하나뿐이다, 사랑뿐이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러면 우리가 서로 구원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것이로구먼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로구먼요?' '그래,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 그것을 버리지 안하고 간직하고 구원을 이루어 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 받는 것이로구먼요?' '그래.' '하나님의 사랑 받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뭣인데요?' '하나님의 전소유를 다 가지고 그 능력을 다 가지고 그 노력을 다해서 기울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한번 말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사죄받은 사죄를 벗지 않으려고, 내가 어떤 환경에서 온다 할지라도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다시는, 다시는 죄에 얽매이고 내가 질 수 없다. 다시는 범죄할 수가 없다 하여 다시는 범죄하지 않으려고 하는, 범죄 하지 않으려고 하면 감옥도 오고 사형도 오고 별별 일이 있는데 그러면 사죄를 우리가 기념해서, 사죄를 기념해서 보존하려고 하면 그러면 여러가지 형벌도 오고, 대적도 오고, 박해도 오고, 여러가지 환난이 오는데 그러면 어짭니까?' '그것이, 네가 사죄를 벗지 안하고 보존할라 하는 그것이 막바로 뭐 받는 것이냐?' '그게 하나님의 사랑 받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 받는 것이라니? 하나님 사랑받는 것 하나님의 사랑이 뭣인데? 하나님의 소유 전부, 하나님의 능력 전부, 하나님의 역사 전부 다 받는 것이 사랑 받는 것이지.' '그러면 내가 죄를 다시는 입지 안하고 사죄 주신 것을 사죄를 그대로 받아 가지고서 사죄 받은 걸 그대로 하는 그것은 전지 전능자의 보호를 입고, 대주재의 모든 소유에 다 그것을 나 위해서 사용하도록 하고, 그분의 쉬지 않는 그 역사의 모든, 모든 만물을 운영하는 그 모든 섭리, 측량 못할 그 모든 섭리 그것이 다 나 위해서 되는 일이 된다 말입니까? '그래.' 이것이, 이걸 우리가 믿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사죄를 벗지 않으려고 내가 어떻게 와 가지고서 '네가 사죄 벗어버리고 다시 죄를 입으라' 하면서 죄를 입으라고 해도 '다시는 내가 죄를 입지 않는다.' 죄를 입은 자가 되라고 죄를 입으라고 해도 죄를 안 입으려고 하는 그것이,
또 의는, 의는 요것은 무엇이 의냐? 의라는 것은 요것 좀 하나님이 내놓은 법칙과 요거와 좀 다르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그게 의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것이 의이다.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것이 의요, 또 죄는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계약을 어기는 것이 죄요,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계약을 어기지 않는 것이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불의를 행치 않는 것은 자기 중심의 단독 행위 하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그것이 이제 의를 행하는 것이다.
화친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제일 높이고, 제일 두려워하고, 제일 사랑하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사모하고, 그에게 맡기고, 그 더불어 동거 동행하는, 요것을, 하나님 두고 너 혼자 있지 말고 하나님과 언제든지 함께 있는 것,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요 사실을 자기가 알고 하나님과 같이 있는 요것이 화친의 생명, 요거는 생명이다. 요거는 생명이라. 의는 요거는 능력을 받는 것이다. 건설을 하는 것이다. 사죄는 벌을 막아서 벌을 받지 않는 것이다. 하나는 벌 안 받는 것, 하나는 상급 받고 강건해지는 것, 하나는 생명에 충만 해지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인데.
그러면 이렇게 사죄에 대해서, 칭의에 대해서, 화친에 대해서 이렇게 하는 이것이 이 세상이 죄악의 조류로, 죄악의 홍수로 지옥을 향해서 마구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유명한 사람 뭐 친척이나 모두가 다 이것 악령의 다 인도함을 받아 가지고서 하나님을,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인데 자기중심으로 해 가지고서 유황불 구렁텅이를 향해서 다 내려가고 하는 이 아주 폭포수와 같은 홍수로 이렇게 내려가는 이 사회의 조류에서, 자기의 직장 조류에서, 이 모든 가족 조류에서, 모든 문화 조류에서 여게서 자기가 그리 같이 휩쓸리지 안하고 하나님이 입혀 주신 사죄와 칭의와 화친을 입고 그대로 살라 하니까 여게 마찰이 있다 그말이오. 여게 마찰이 있다.
이 마찰 있는 이것을 두고서 네가 마찰이 있으니까 '예수 믿는 생활은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생활이요 고생하는 이 고행이요 고행 생활, 고행 생활이 예수 믿는 생활이로구나.' 네딴에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아니다. 네가 지금 내용을 못 봐 그렇다. 이 껍데기는 고행하는 생활 같지만 이 생활이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내가 가진 그 기쁨 너거도 가지게 된다. 내가 가진 기쁨. 예수님이 가진 기쁨은 세상이 빼앗을 기쁨이 아니요, 땅에 속한 기쁨이 아니요, 이제 만물에게 만물 재판에 정죄받을 기쁨이 아니요, 모든 것이 주라 시인하는 그런 참 씩씩하고 깨끗하고 온전한, 모든 것들에게 감 화를 주고 그들을 다 머리를 숙이게 하는 이런, 하나님도 기뻐하고 피조물도 기뻐하는 이런 기쁨, 이 평가적인 기쁨, 비판적인 기쁨, 이 심판적인 기쁨, 완전한 기쁨, 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충만케 하기 위해서 내가 이걸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네가 고통당할 것 같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지 말아라. 그렇게 대적이 내가 이와같이 지금 구속을 벗지 안할라 하면 대적들이 와 가지고서 달라드니까 그 대적들의 힘은 장사고 내 힘으로 말하면 개미만도 못한데 온 나라가 달라드는데 온 사회가 달라드는데 그 강한 세력에게 나는 개미 한 마리만도 못하는데 내가 당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 게 아니다. 그것이 네가 그것을 양보하지 안하고 뺏기지 않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것, 하나님의 계명 지키다니?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보수하는 것이다. 그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세상에 보여서 빛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계명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 행사가 무슨 행사나 하면 하나님의 전소유와 전능력을 다 너에게 기울이게 하는 그 행사다. 이러니까 네가 기울일 때에 네가 얼핏 보기에는 피조물의 세력이 강하니까 네가 절단날 것 같지만 그것이 그게 아니고 이 창조주와 전지 전능자의 모든 것을 다 너에게 기울이고 모든 소유를 다 기울이고 전 노력을 다 너한테 기울이는 그 기울임을 네가 독차지해 가지고서 그걸 받는 그 일이기 때문에, 그 실상 그것을 받는 일이요 껍데기로 볼 때에는 그런 것에게 대항을 받는 것인데 대항을 받는 그것은 네 구원을 없애려고 하는 것인데 대항을 받는 것 같지만 이것이 이러기 때문에 이 세력이 강해서 이래 하기 때문에 이것은 세상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충만케 하려 함이다" '지극히 큰 능력의 보호를 너희가 입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잠깐 동안 견디고 보면 오히려 그게 기뻐한다' 이러기 때문에 네가 이 구원을 이것을 보수할라 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존할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입는 것이다.
이것이 외부에는 어렵지만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네가 담뿍 입는 역사이기 때문에 그분이 나에게 전능으로 너를 돕고 모든 소유를 다 기울이니까 너를 핍박하는 그 사람조차도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결국은 너를 핍박하고 욕하는 그것이 마지막에 너를 찬송하고 너를 존대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적으로는 그게 된다. 이러기 때문에 요 사실을 믿으라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3. 하나님과 말씀의 약속을 온전히 믿고 열매 맺는 일에 전심전력 기울여라
3.1. 열매만 맺으면 하나님께서 깨끗게 해 주신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주님이 주신 이 구원을 내가 놓지 않으려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전부 그것 위해서 다 있다. 이리 가도 저리 가도 그 가는 길만 다르지 나중에 마지막에 보면 그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것뿐이다. 딴것 없다.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 무한하신 능력을 나를 내가 입으려거든 그렇게 입어라. 그런데,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과실을 맺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가꾸어서 잘 되도록 과실을 더 많이 맺도록 하기 위해서 가꾼다. 가꾸는 것은 식물 같으면 거름도 주고, 북도 주고, 잡초도 제하고 잘되도록 하는 것이 가꾸는 것 아닙니까? 식물에 해로운 것은 다 제거하는 것이 가꾸는 것이요 또 식물을 더 잘 자라게 하는 것이 가꾸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말로 해서 "이를 깨끗게 하시느니라" 이랬다. 이를 더 과실을 더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 깨끗게 하시는 것이다. '깨끗게 한다'
이러니까 우리가 요 구원 요것만 버리지 안하고 요것을 보존하고 내가 그럼으로써 보고 듣는 사람이 내 구원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빛도 되고 그래 가지고 그들도 회개도 하고 또 구원 전달이 바로 된다 말이오. 요것을 요 세 가지 구원을 내가 벗지 안하고 입고 있는 요것이 뭣이냐? 요것이 농부의 전부를 기울여서 나를 위하는 그것을 받는 것이 된다. 그러면 나를 위해서 받는, 나를 위해서 기울이는데 나를 위해서 기울이면 뭣 한다 하던고? 나를 위해서 기울이는데 그것이 나를 깨끗게 하신다고 표시를 했다.  
깨끗게 한다는 것은 그 식물에 있어서는 안 될 것,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을 다 제해 버리는 것이오.
제가 보니까 식물에 아주 흙이 많이 묻으니까, 그 식물에 다른 게 없지만 흙이 묻었으니까 그게 그만 발육이 안 돼서 안 된다 말이오. 그러니까 농부가 와서 씻습디다, 물로 그걸 씻어. 물로 씻으니까 그 다음부터 그 잎사귀가 제 구실을 하게 된다 말이오. 못쓸 흙이 묻었으면 씻어줘야 되고, 또 어떤 사람은 보니까 거게 무엇을 자꾸 물로 씻어. 눈에 보이지는 않는데 물로 씻어. '왜 씻습니까? ' '여게는 독약을 쳤기 때문에 독약이 묻었으니까 이것 녹기 때문에 그래 지금 물로 씻다.' 또 말하기를 '그러면 독약을 뭐 하려고 쳤습니까?' '여게 벌거지가 어떻게 많은지 독한 벌거지가 들었든지 그래 이 약을 쳐서 인제 독한 버러지가 다 죽었다.' 이랬다.
그러면 포도나무는 보면 제게 해충이나 무슨 그런 해하는 벌레나 이런 것이 옵니다. 오면 그것을 제 자체의 고장난 것은 이게 치료가 되지만 제 자체가 아닌 딴것이 와 가지고 붙어 가지고 해하는 것은 도무지 그것은, 제 자체 고장은 가지에 무슨 흠이 났으면 가만히 짜매 내비두면 나중에 거기 새 살이 나와 가지고 가지가 이렇게 덜렁덜렁한 게 딱 들어붙다. 붙지만 딴데 와 버러지나 해하는 그런 것은 그게 제거하지를 못한다 말이오. 그걸 제충을 못해요. 이 순애기를 벌거지가 와서 갉아먹으니까 쩍해야 하는 것이, 자꾸 갉아먹으니까 싸운다는 게 그것밖에 못 해. 자꾸 진액만 자꾸 내놓으니까 물이 출출 출출 자꾸 나오고 하니 이놈이 좋다고서 빨아 먹고서 살이 쪄서 이만치 그놈이 띠글띠글해 가지고 덜렁덜렁해진다 말이오.
그러나 이제 주인이 그것 보니까 열매를 맺지 안한 가지 같으면 '이거는 벌써 거름도 들고 이것 재미 없다.' 싹 끊어내 버리지만 과일이 많이 맺으면 과일 때문에 그 제충을 해 준다. 제충을 해 주면 그만 그거는 없어져 버립니다.
인제 이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무슨 그 신상에든지, 자기의 입신에든지, 출세에든지, 사업에든지, 자기 무슨 활동에든지, 가정에든지, 사회적으로서든지, 뭣으로든지 우리에게 오는 어떤 해독이라도, 자꾸 우리에게 오는 그 해독을 자기 잘못된 것은 스스로, 고칠 수 있지만 객관성에서 오는 해독은 절대 믿는 사람은 제가 제거하지를 못한다는 걸 여게서 판정을 가지고 가야 된다. 믿어야 된다. 못 한다. 되는 줄 알고 하는 사람은 저만 곯고 멸망당하지 헛일이다.
이러니까 못 하지만 그 모든 해충들이 와 가지고서 그렇게 하는 것 그것은 제충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열매를 맺으면 주인이 와 가지고서 싹 소독을 치든지 어쩌든지 해 가지고서 제충을 다 해 버린다 그말이오.
이러니 이것 모양으로 우리들이 이렇게 이 계명 지키는 것 이 구원 이루는 이 구원을 버리지 안하고 이 구원만 붙들고 구원을 놓지 안하고 이 구원을 이루어 가는 일, 곧 그것이 계명 지키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담뿍 받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담뿍 받으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오는 모든 해는 다 그걸 제거해 버립니다.
이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을 입혀 주신 요 하나를 뺏기지 안하고 요것을 보존하려고, 어데서든지 죄 안 지으려고 하는 데 거게, 죄 안 지을라 하면 모든 해가 다 올 것 같지만 죄 안 지을라 해 가지고서 죄를 지으라고 박해가 오고 할 때에 죄 안 짓는 이 투쟁을 자기가 양보하지 안하고 죄 안 짓는 그 일을 통과만 했으면 그 해독은 주님이 다 제거해 버립니다.
우리가 의를 보수할라고, 하나님과 화친을 이것을 보수할라고 하는 이 구원만 우리가 보수를 하고 구원을 양보하지 안하면 이것이 구원 양보하지 안한 이것이 하나님의 전부를 내가 다 차지하는 이 은총을 입는 것이다. 이걸 양보하지 않는 것이 내게 멀고 가까운 모든 해독을 다 제거해 버리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이 외에는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참 좋은 입장과 처지를 가졌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 무한하신 사랑, 무한하신 그 역사, 하나님의 그 충만한 소유, 그분의 전부를 다 나 위해서 기울이게 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니 내가 열매 맺는 것, 열매 맺는 것. 내게 오는 모든 해독을 내가 처리 못 할 모든 해독을 이것을 다 당장 처리해서 이것을 다 해결짓도록 하는 것도 그 방편은 하나뿐인 것.
그 방편은 뭣인가? 그 방편은 열매 맺는 것. 그 열매가 뭣인데? 구원 이루는 것. 구원 이루는 것이 뭣인데? 어데서든지 사죄 입혀 주신 이 사죄를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이 사죄 입은 그대로 제가 입고 있지 이 사죄를 벗어 주지 말고, 다시 더럽히지 말고, 다시 죄에게 져서 죄에 종이 되지 말고 죄와 상관 없는 자로 계속하는 것이 이 구원을 입는 것이다.
이것 위해서 이렇게 입는 것을 보고 가족들이, 아무리 입으로는 전도를 해도 잘 듣지 않는 사람도, 아, 그 사람이 보니까 '매를 맞아도 죄를 안 짓네. 직장 떨어져도 죄를 안 짓네. 감옥에 갇혀도 죄를 안 짓네. 어떻게 매장을 당해도 죄를 안 짓네. 참 인간이 다 오장육부가 있는 것인데 그 모든 오기가 다 죽어지고 사람이 어떻게 된다 해도 죄를 안 짓네.' 죄 안 짓는 이것이 자기 구원이요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요 이것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을 받는 것이다.
또 하나님에게만 피동하는 것이 이것이 이제 재연결 시켜서, 하나님에게만 피동하는 이것이 의인데 하나님에게만 피동될라 하니까 이 사람이 시키고, 저 사람이 시키고, 뭐이 시키고, 뭐 국가가 시키고, 뭐이 시키고, 이렇게 시키고, 하나님에게 피동만 할라 하다가 다니엘이 사자구덩이에 들어갔고 하나님에게만 피동할라 하다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 불미 속에 들어갔다 그거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요것이 어떤 일이 자기에게 부딪친다 할지라도 '저 사람이,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뭐인데 눈에 하나님이 보이나? 이런데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고, 이 전국이 지금 야단을 지기는데 신사참배 안 하면 자꾸 사람을 죽이고 가두고 지금 굶어죽고 이래 가지고 이 야단이 나는데' 이 사람은 전부 장 오니까 '어찌 됩니까?' 성경을 내 보이면서 ''이 성경에 우상에 절하면 하나님께 죄가 된다 했는데 이거 성경에 이래 놔서 못 한다. 하나님의 뜻에 위반이 돼서 못 한다.' 자꾸 이 소리만 하니 또 와서 또, 오늘도 '오고 내일도 오고, 한 달 오고 두 달 오고, 뭐 일 년도 오고 자꾸 계속해 와도 그말 자꾸 그말만 해 재끼니,
하면서 '이거 합병할 때, 일본과 우리 나라와 합병할 때에 국제 조약에서 이거 지금 조약에 조문으로 돼 가지고 있는 성경 아닙니까? 이 성경에 그래 놨으니 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은 자꾸 그래 말한다 말이오. '하나님의 뜻이 뭐인데?' 이러다가 나중에는 그만 하나님의 뜻이고 뭐이고 잡아도 가고 뚜드리기도 하고 뭐 가두기도 하고 야단이다. '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은 신사참배 안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해 가지고 하나님 뜻이 무엇인데 가둬도 하나님의 뜻은 어길 수 없다 하지, 죽어도 하나님의 뜻은 어길 수 없다 하지,' 사형장에 끌고 가니까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지금이라도 항복해라.' 아 '나는 지금 주일은 범할 수가 없다.' 총을 한방 탁 놔 가지고서 팔이 하나 떡 떨어졌어, 배추달씨. 떨어지니까 '이래도 주일 범하지 못하겠느냐? 이래도 오늘 그러면 시키는 일 못 하겠느냐?' '못 한다.' 또 하나 탁 놓으니까 왼팔이 똑 떨어지니까 구부리고 있다가 또 그래 일어나면서 '이래도 네가 주일날 일하지 못 하겠느냐?' '못 한다.' '이것 뭐인데 하나님을 뜻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이런가?' 그 사람이 죽였지만 인민군 그 사람이 거기 피해 가지고서 도피해서 이남에서 예수를 믿을런지 모른다 그말이오. 그게 구원을 주는 거라. 그게 구원을 자기가 받은 구원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받은 구원을 보존할 뿐 아니라 새 구원을 받는 것이다.
새 구원 뭐? 하나님의 모든 것 다 기울여 가지고서 자기를 더 과실을 많이 맺게 하는 이 은총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을 보존하는 것이요 구원을 주는 것이요. 받는 것이라,
또 하나님과 동행, 하나님 배반하라고 '한번 그저 하나님 어기면 어떠노?' 이래도 안 어길라고서 어떤 박해가 와도 하나님을 버리지 안하고 놓지 안하고서 이 동행하는 것. 다니엘이 바벨론에 잡혀가 가지고 왕의 진미를 먹으라 해도, 이제 하나님 배반해 가지고 포로된 우리들이 잠시라도 음식 그것 의지하고 하나님 의지 안 함으로써 하나님과 멀어질까 해서 그짓 안 했다. 인제 그게 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입는 것이다. 그게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다.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았더라 그말이오.
그런데 요게 구원인데 요게 무슨 일이냐? 요게 하나님의 총 사랑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 전능의 그 은총의 보호를 입는 것이다. 하나님 모든 소유를 자기를 위해서 기울여 주심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노력이 자기 위해서 하는 요것을 가지는 요것이 되는 요 사실을 우리가 잡고서 놓지 안해야 된다.
3.2. 구원을 버리면 하나님도 전지전능으로 해치신다.
이러니까 그 정반대로 생각해 보면 될 거라 그거요. 우리가 뭐 위해서 그 구원을 버리면, 구원 버리면 어찌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 가지고서 그 사람을 멸함을 받을 것이다. 지키면 전지전능이 도우니까 그 구원을 배반하면 전지전능이 그를 해할 것 아닙니까? 그 전지전능이 그 사람을 보호하는 반대로서 전지전능이 그 사람을 해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요 포도나무 비유 요것을 기억하고, 그저 '자, 우리 지금 사업에 이 큰 낭패를 당했다. 낭패당했으니까 이거 이 관서에 가 가지고서 감독 관청에 가서 교섭을 해야 되겠다. 또 뭣 해야 되겠다. 뭘 해야 되겠다. 또 어떤 전주와 어떻게 해야 되겠다.' 백날 돌아다녀야 헛일이니까 그저 네가 전지 전능자의 도움을 입으려거든 그분이 와 가지고 해충을 톨톨 털어버리고 농약을 쳐서 싹 죽여버리도록 이렇게 하려면 네가 계명을 버리지 말고 계명을 지키라. 네가 구원을 버리지 말아라. 계명은 뭣이 계명인데? 계명은 구원이라. 구원을 버리지 말고 구원을 지키라. 이 구원을 세상에게 보여 줘라. 이 구원을 뺏기지 마라. 이 구원을 보존해라.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입는 것이요 내게 오는 모든 피해를 확 다 벗어서 전멸시켜 버려. 이것이 복수하는 유일의 방편이다.
우리가 수많은 원수를 복수를 달리는 못 해요. 복수를, '이 복수하는 것이 이 구원을 버리지 안하고 구원을 입는 것이라' 하면 사랑에 모순되기에 벌써 그거는 틀렸다 그말이오, 복수야 그거야 하든지 말든지 내비두고 나는 이 구원만 보존하면 하나님께서 다 잡충도 다 제거해 버리고 뭐 풍재도 한재도 다 제거해 버려.
우리 농부들도 요새 보니까 옛날과는 달라서 바람 오면 하우스 해 가지고 다 치는데 하나님이 그것 못 하겠습니까? 또 빠짝 마른 데도 펌프 가지고 물 대 가지고 다 하는데 못 하겠습니까? 이러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계약을 믿어야 된다. 믿는 데에 능력이 나오고 믿는 데에 하나님이 일할 수 있다 안 믿는 자에게는 일할 수가 없어. 믿으면 당신이 일을 할 수가 있어.
이러니까 우리가 이 구원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내가 이 구원을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 구원을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새 사랑을 자꾸 입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이 구원을 주는 것이다. 사랑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부를 다, 다 힘입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게 해하는 것을 완전히 다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라. 요것을 잡고 요렇게 살면 즉시 된다. 요렇게 살면. 물론 하나님께서 다른 섭리가 특별히 있는 것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다 된다. 특별한 섭리가 있으면 거게는 특별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모르는 역사로 큰 역사가 드러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 되니까 우리는 여게 입각해 가지고서 삽시다.
살되 그 우리가 조부라와서, 아이들에게, 아이들 데리고 가 가지고서 뭐, 뭣을 심으면 종자를 심으면 그것도 따라와 가지고서, 밭을 만들었다고 요만치 만들어 가지고서 '여게 심으면 뭣 됩니까?' '이게 심으면 이제 벼가 돼 가지고서 뒤에 쌀 나온다.' '그래요?' 금방 심어 놓고 좀 있다가서 '이 뭐 쌀이 안 열었다' 와 가지고서. '아직 안 연다. 오래까지 기다려야지.' '이걸 이라면 이런 감자가 이 밑에 연다.' '그래요?' 그래 놓고서 한참 있다가 '얼마나 기다려야 됩니까?' '아직 멀었어. 그래 심어 놓고서 잊어리고 있어.' '오래 있을까요?' 한참 놀다가 '이제 됐지요?' 이래 가지고 안 되니까 살며시 파 봅니다. 이래 파 보니까 움도 안 나왔거든. 그러니까 '아직까지 감자 그대로 있습디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해서 믿되 끝없는 믿음을 가지라 말이오. 그만 믿는 것을 아브라함은 그대로 믿고 죽지 안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는 영원이 있기 때문에 부활이 있으니까 그저 끝없는 믿음을 가져요, 그대로. 그대로 나가서 이렇게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내 조부라운 생각대로 시간이 맞지 않는다고 그런 조급한 생각 가지지 말고 하나님을 끝까지 믿어서, '아버지는 농부라, 주님은 포도나무라. 나는 가지라. 열매 맺으면 다 입는다. 주님에게 붙지 안하면 헛일이라.' 주님에게 뭘로 붙었습니까? 죄 지으면 끊어진다. 하나님에 피동 되지 안하고 어떤 것에 피동되면 끊어진다. 하나님하고 하나되지 안하고 어떤 것하고 하나되면 끊어진다. 그와 이 셋만 돼 가지고 있으면 끊을 장사가 없어. 이러니까 이래 가지고 있어야 인생의 결실을 할 수 있다 그겁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해야 한다. 참 믿어야 돼요. 이래 가지고 실지로 믿어야 된다. 믿는 사람이 아버지의 거룩하심같이 거룩할 수 있다. 온전하심같이 온전할 수 있다. 털끝만한 죄도 알고는 범죄하지 않을 수 있다. 말에 흠이 없이 살 수 있다. 없는 게 아니다. 고요히 생각하면서 진리를 생각하면서 우선 작정해야 한다. '나는 지금부터 나는 이래 살겠다.' 세상이 나한테 향하지만 하나님의 계약에 내가 과실을 맺는데, 과실을 맺다니? 무슨 과실을? '내가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데, 그 계명을 지키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다 독점을 하는데 피조물들이 방해하면 뭐 어떻겠느냐? 내게 어떻게 하겠느냐?' 이것을 믿되 무슨 이런 일이 있고 저런 일이 있어도 '아이구 헛일이네' 하지 말고 끝까지 믿어요. 눈 앞에서 다 실패가 되도 의심하고 낙망하지 말고 끝까지 믿어요. 믿고 죽어요. 이게 신앙가이다.
2013년 8월 30일, 04, A+, Bongwon Yoon. I.